어텀 글로리(AUTUMN GLORY), 한국에는 없는 오텀 글로리? (520 색연필 #13)

저는 예쁜 컬러와 다양한 이름을 가진 대형 색연필 세트를 몇 년 전에 샀습니다. 사실 저는 그림이나 색상 표현, 설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서 그냥 색연필의 이름들을 하나씩 블로그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오늘의 색연필은 'AUTUMN GLORY(어텀 글로리)'라는 이름입니다.

색연필 검색하다 발견한 미국 사과

무겁지 않지만 가볍지는 않은 이 예쁜 이름을 검색했더니, 미국 북미 지역에서 재배되는 사과 품종이 나왔습니다. 

이 사과는 미국의 식물학자들이 워싱턴주(미국 수도 워싱턴 D.C가 아닌 워싱턴주)에서 후지 사과(원산지 일본)골든 딜리셔스 사과(원산지 미국)를 천연 교배하여 1976년에 만들어내 품종입니다.

새로운 사과 품종이 나오기는 했지만, 바로 판매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잘 자라는지, 사과의 맛이 똑같이 계속 유지되는지 수십 년 동안 테스트를 거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미국의 대형 과일 기업인 '슈퍼그레시 그로어스(Superfresh Growers)'사가 이 사과의 독점 권리를 사들이면서 2011년에 공식 출시되었습니다.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520 색연필 어텀 글로리 색상의 제품 전체 사진. / A full product photo of the 520 colored pencil in the Autumn Glory shade, placed horizontally on a rough-textured background mixed with pink and white.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에 가로로 놓인 520 색연필 어텀 글로리 제품 전체 사진


사과의 형태로 표현한 가을 그 자체

너무 신기해서 오텀 글로리 사과의 공식 홈페이지를 찾아서 들어가 봤습니다. 메인 화면에 적힌 문구부터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신이 분명 좋아할 진한 사과 맛!"
"오텀 글로리(Autumn Glory®)는 슈퍼그레시 그로어스사에서 북미 지역 독점 재배 및 판매하는 특별한 사과 품종입니다. 자연스러운 단맛과 아삭한 식감이 일품인 이 사과는,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입안 가득 은은한 계피(시나몬) 향과 캐러멜 향을 선사합니다.

어떤 이들은 수제 사과 소스 맛 같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따뜻한 사과주를 마시는 것 같다고 합니다. 어떤 표현을 쓰든, 오텀 글로리는 사과 속에 담긴 가을 그 자체입니다."

공식 설명문 중에 "사과의 형태로 표현한 가을 그 자체(Autumn Glory is fall in apple form.)"라는 문장의 표현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사과의 형태인 가을이라니, 상상만 해도 마음이 가을입니다.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보이는 사과가 정말 너무 탐스럽고 맛있어 보여서, 이미 사과 맛을 알면서도 어떤 맛일지 궁금해집니다.



'오텀 글로리' 이름에 담긴 진짜 뜻과 이유

우리가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사과는 1년 내내 언제든 살 수 있기에 사과의 제철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과는 봄에 꽃이 피고, 여름 내내 뜨거운 햇빛을 받아 알이 굵어지며, 10월에서 11월 가을이 되어야 빨갛고 노랗게 완전히 익는 '가을 과일'입니다.

어텀 글로리 사과 역시 10월 중하순 가을이 되어야 특유의 천연 단맛과 시나몬 향이 정점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때 사과를 수확하는 과수원의 풍경을 보면, 주렁주렁 열린 사과들의 색상이 마치 '붉게 물든 황홀한 가을 노을'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직역하면 '가을의 영광, 장엄한 광채'라는 뜻을 가진 이 이름은, 정말 이름 그대로 가을의 석양을 쏙 빼닮은 화려한 빛깔과 입안 가득 퍼지는 가을의 시나몬 향을 사과 한 알에 그대로 담아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520 색연필 어텀 글로리 색상의 몸통에 숫자 39와 은박 문구 'AUTUMN GLORY'가 새겨진 클로즈업 사진. / A close-up photo of the 520 colored pencil in the Autumn Glory shade, engraved with the number 39 and the silver-foiled text 'AUTUMN GLORY' on its body.
520 색연필 어텀 글로리 몸통에 새겨진 숫자 39와 은박 문구 'AUTUMN GLORY' 각인


일반 사과 VS 오텀 글로리 사과 영양학적 이점

사실 사과는 품종을 막론하고 건강에 좋은 점이 많습니다.
  • 강력한 항산화 성분: 붉고 노란 사과 껍질에는 세포 손상을 막고 노화를 방지하는 안토시아닌과 퀘르세틴이 풍부하게 들어있습니다.
  • 장 건강을 돕는 식이섬유: 사과의 아삭한 과육과 껍질에는 장내 유익균의 먹이가 되어 배변 활동을 돕는 '펙틴' 성분이 예외 없이 가득합니다.
  • 낮은 열량과 풍부한 영양: 중간 크기의 사과는 대부분 90~100kcal 내외로 열량이 낮으면서도, 누적된 피로를 해소하는 비타민C와 체내 나트륨을 배출해 주는 칼륨이 풍부합니다.

그렇다면 전 세계 사과가 다 가지고 있는 이 장점들을 제외하고, 오텀 글로리 사과만의 진짜 차별점은 무엇일까요?

사과인데 시나몬과 캐러멜 향이 나는 '꿈의 사과'를 먹을 수 없는 이유

오텀 글로리 사과의 가장 큰 무기는 위에 홈페이지 설명에서도 보았듯,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은은한 계피(시나몬) 향과 달콤한 캐러멜 향입니다. 먹어 본 사람들은 마치 따뜻한 사과주(애플 사이더)나 수제 사과 소스를 먹는 것 같다고 극찬합니다.

말만 들어도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꼭 먹어보고 싶어지는 '꿈의 사과'입니다. 해외에서는 이 사과를 '인생 사과'로 꼽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이 사과를 한국에서 절대 먹을 수 없습니다.

현재 국내 법령 상 '식물방역법'에 따른 엄격한  수입 금지 조치가 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과수화상병 등 치명적인 해외 식물 병해충이 국내 과수 농가로 유입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미국산 생과일(사과)은 한국으로 정식 수입 및 판매가 원천 불가능합니다. 


520 색연필 어텀 글로리 몸통 끝부분에 은박으로 'Y10 / 520 colors' 문구가 새겨져 있는 클로즈업 사진. / A close-up photo of the end of the 520 colored pencil in the Autumn Glory shade, engraved with the silver-foiled text 'Y10 / 520 colors' on its body.
520 색연필 Y10 /520 colors


미국 안 가고 한국에 씨앗을 수입해 심으면 안 되나요?

미국산 생사과는 수입 금지라 먹을 수 없다니 안타깝습니다. 여건이 된다 해도 겁이 많아서 미국 여행은 생각도 못 하는 저는 "그럼 오텀 글로리 사과 씨앗을 한국에 들여와 재배하면 안 되는 걸까?" 하고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장벽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유전적인 문제입니다. 
사과는 씨앗을 심으면 부모 사과와 전혀 다른 무작위의 사과가 열립니다. 오직 기존 오텀 글로리 나무의 가지를 잘라 다른 사과나무 기둥에 붙이는 '접붙이기(Grafting)'방법으로만 복제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무시무시한 법정 장벽인 '클럽 품종(Club Variety)'시스템입니다. 
오텀 글로리는 전 세계 아무나 키울 수 없도록 철저한 독점 비즈니스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허락 없이 몰래 키우다 걸리면 특허권 침해로 막대한 금액의 소송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불법으로 접붙인 사과나무 전체를 뿌리째 뽑아 불태워 폐기해야 합니다.

1976년 탄생~2026년 현재: 사과나무 저작권의 대반전

그렇다면 사과나무와 관련된 법적 진실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여기엔 반전이 있습니다.

1) 사과나무 특허(저작권)는 완벽한 공짜!

식물학자들이 이 사과를 처음 교배해 만든 건 1976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식물 특허는 '만든 날'이 아니라, 과학적 검증을 거쳐 국가에 등록(출원)한 날'부터 계산됩니다. 이 품종은 개발 단계를 거쳐 1998년에 미국 특허청에 등록되었습니다. 사과나무 특허는 '시장에 출시되어 판매를 시작한 날(2011년)'이 아니라, '특허를 등록한 날(1998년)'부터  20년 동안만 유지됩니다. (1998년부터 2011년까지 13년 동안은 겨우 몇 그루 있던 샘플 나무를 접붙이기 방법으로 수천, 수만 그루로 늘리며 대량 생산을 준비한 공백기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특허 기한 20년이 지난 지금, 이 사과나무를 키우는 행위 자체는 전 세계 누구나 무료입니다. 미국 회사에 저작권료(로열티)를 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2) 하지만 워싱턴 회사의 '상표권' 꼼수

나무 자체는 공짜가 되었지만, 미국의 독점 과일 기업인 '슈퍼그레시 그로어스(Superfresh Growers)'사는 특허가 끝나도 자기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머리를 썼습니다. 바로 '오텀 글로리(Autumn Glory)'라는 이름의 상표권 때문입니다.

사과나무 특허는 20년이 지나면 소멸하지만, 이름(상표)은 10년마다 국가에 갱신 수수료만 내면 50년이든 100년이든 평생 독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이름 뿐인 특허 만료

애초에 나뭇가지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 독점 회사가 전 세계로 오리지널 나뭇가지(대목)가 유출되지 않도록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적으로 키워내도 이름을 못 씁니다.
만약 한국의 어떤 농가에서 기적적으로 나뭇가지를 구해와 훌륭하게 수확해 냈다고 하더라도, 마케팅이나 상자에 '오텀 글로리'라는 문구를 넣기만 해도 상표권 침해 소송을 당하게 됩니다. 이 사과가 그 유명한 시나몬과 캐러맬 향이 나는 사과라는 것을 홍보할 수가 없습니다.


520 색연필 분홍색 배경 위 어텀 글로리 색상 몸통과 옅은 갈색 연필심이 보이는 끝부분 클로즈업 사진. / A close-up of the 520 colored pencil featuring an Autumn Glory-colored body and a light brown tip on a pink background.
520 색연필 어텀 글로리 연필심


붓뚜껑에 숨겨온 목화씨의 반전 진실

이렇게 사과 씨앗과 밀수, 그리고 법에 대한 이야기를 쓰다 보니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역사 속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붓 통에 숨겨온 문익점의 목화씨' 이야기입니다. 바로 검색을 해봤는데 제가 알고 있던 이야기와 달랐습니다.

정식 역사서인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의 기록에는, 문익점 선생이 목화씨를 붓뚜껑에 몰래 숨겨왔다는 말은 전혀 적혀있지 않습니다. 그저 덤덤하게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십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라고만 적혀 있을 뿐입니다.

알고 보니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씨는 해외 반출이 금지된 밀수품이 아니었습니다. 과수원이나 길가에서도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물이었기 때문에 굳이 '목숨을 걸고 붓뚜경에 숨겨서' 들여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이 역사를 극적이고 흥미진진하게 만들기 위해서 '스토리텔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익점 선생의 위대한 업적이 깎이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주머니에 담아온 씨앗은 단 10여 개뿐이었는데, 싹을 틔우기가 영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위인 문익점의 밭에 심은 것은 모두 실패했고, 다행히 그의 장인어른 정천익 선생의 밭에서 겨우 '딱 1개'가 기적적으로 싹을 틔우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노력으로, 단 하나의 싹을 수천, 수만 개로 불려 나갔습니다.

목화가 보급되기 전까지 고려의 일반 백성들은 매서운 한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얇은 삼베옷이나 모시옷을 여러 겹 겹쳐 입으며 추위에 떨어야 했습니다. 문익점 선생이 목화 재배와 보급에 성공하면서, 우리 백성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따뜻한 솜 이불을 덮고 무명옷을 입으며 겨울을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짜 붓뚜껑 밀수 이야기보다 1개의 싹을 포기하지 않고 키워낸 이야기가 훨씬 더 위대한 역사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종이에 색칠해 본 어텀 글로리

종이에 직접 색칠해 보았습니다. 색연필은 단단하고 무르지 않고 보이는 것처럼 잘 색칠됩니다. 구글에 '어텀 글로리'의 색상 특징을 검색해 봤습니다. '단순히 쨍한 주황색이 아니라, 붉은빛과 노란빛이 따스하게 감도는 짙고 풍성한 탠저린/오렌지 계열의 색상'이라고 합니다. 저는 잘 몰라서 제 느낌만 적자면 '따뜻함이 느껴진다'라고 하겠습니다.


520 색연필 어텀 글로리 색상을 네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종이(미색, 흰색, 크라프트지, 검은색 종이)에 칠해 색감을 비교한 발색 테스트 사진. / A swatching photo comparing the 520 colored pencil in the Autumn Glory shade across four different paper types: cream, white, kraft, and black paper.
네 가지 다른 종이 위에서 각각 다르게 표현되는 520 색연필 어텀 글로리 색상의 발색 비교


마치며

과일을 너무 좋아하는 제가 언젠가라도 '오텀 글로리 사과'를 먹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색연필 이름을 검색하다 우연히 알게 된 저작권이나 특허법 상식들은 금방 잊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알 수 있어 재밌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익점 선생의 목화씨 사실도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그 누구라도 시나몬과 캐러멜 향이 나는 '오텀 글로리 사과'를 드실 기회가 생기신다면, 그냥 꼭 드셨으면 좋겠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