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색연필 30번째 : 라임 에이드 (Limeade) 관련 지식 기록
사용하지 않고 묵혀 두고만 있던 색연필을 열었습니다. 몇 년 전, "그림 좀 그려보자"라는 마음을 먹고 구매한 색연필입니다. 당시 백수였던 제 형편에는 꽤나 큰 지출이었던 520색 색연필 세트입니다.
하지만 무슨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고, 그냥 뭐라도 그려보자 했을 뿐인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항상 눈앞에 장식품처럼 두었던 색연필인데,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선도 긋고 색칠도 조금씩 해보고 있습니다.
이 520색이나 되는 색연필을 리뷰 겸 기록으로 남겨보려고 하며, 색상마다 담겨 있는 다양한 이름들의 세상도 함께 기록하려 합니다. 오늘 기록으로 남길 라임 에이드(Limeade) 컬러의 이름 뒤에는, 대항해시대 선원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괴혈병을 이겨낸 역사가 있습니다. 그림을 모르는 제가 색상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 보았습니다.
대항해시대의 공포, '악마의 질병' 괴혈병(15~17세기)
15세기 유럽인들이 본격적인 장거리 바다 항해를 시작하면서, 선원들을 가장 공포에 떨게 한 것은 폭풍우나 해적이 아닌 '괴혈병'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식처럼 먹는 비타민C는 사람 몸의 세포들을 접착제처럼 이어주는 '콜라겐'을 만드는 필수 영양소입니다. 비타민C가 몸에 없으면 몸 안에서 콜라겐을 새로 만들지 못해 결합 조직들이 느슨해지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혈관 벽이 약해지면서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잇몸 조직이 약해져서 피가 멈추지 않으며 치아가 그냥 툭툭 빠져버립니다. 심지어 수년 전에 다쳤던 흉터나 골절 부위의 콜라겐 결합까지 느슨해지면서, 과거의 상처가 다시 찢어지는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 일어납니다. 몸 전체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서운 질병 때문에 당시 역사적 기록을 보면 선원의 3분의 2 이상인 68%(170명 중 116명)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수치가 있을 정도입니다. 고립된 배에서 선원들은 극심한 공포와 패닉 상태에 빠졌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탄수화물, 단백질, 필수 영양소 같은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게다가 장기 항해 중인 배 안에서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식재료만 실을 수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몇 달 동안 소금에 절인 딱딱한 고기(육포)와 마른 빵, 그리고 질 나쁜 맥주만을 먹으며 버텨야 했습니다. 신선한 채소나 과일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기에,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 채 선원들은 죽어 나갔습니다.
오늘 포스팅하고 있는 색연필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부드러운 연둣빛 색연필에 새겨진 LIMEADE의 '라임'이 바로 선원들을 죽음에서 건져낸 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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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연필에 새겨진 18, LIMEADE |
인류 역사상 최초의 통제된 임상시험(1747년)
이유도 모른 채 선원들이 죽어가자, 1747년 영국 해군 군의관 제임스 린드(James Lind)가 역사적인 실험을 합니다. 괴혈병 환자 12명을 2명씩 여섯 그룹으로 나누어, 같은 환경에서 식단만 다르게 주는 '인류 최초의 통제된 임상시험'을 진행한 것입니다.
바닷물, 황산 희석액 등을 먹이는 고통스러운 실험 군도 있었고, 사과주를 마시는 그룹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민간요법으로 좋다고 알려진 오렌지와 레몬을 먹인 실험 군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감귤류를 먹은 환자들은 단 며칠 만에 회복되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떤 성분(비티민C) 때문인지는 정확히 몰랐으나, 감귤류 과일이 이 끔찍한 병을 해결한다는 결정적 단서를 잡은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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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짝이는 은박 Y42/520 colors |
제임스 쿡 선장의 실전 도입과 관료주의의 벽
이 연구를 실전에 완벽하게 도입한 인물이 바로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입니다. 그는 제임스 린드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제1차 세계 일주 항해(1768년~1771년) 중 선원들에게 과일즙과 양배추 절임인 '사워크라우트(Sauerkraut)'를 먹였습니다. 배의 청결도 철저히 유지했습니다. 덕분에 단 한 명의 선원도 괴혈병으로 잃지 않는 대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 해군 수뇌부의 지독한 관료주의 때문에, 이 조치가 전체 군함에 공식 의무화되기까지는 무려 48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결국 1795년에 레몬과 라임 주스 배급이 법적으로 의무화되면서 영국 선원들은 늘 라임 주스를 달고 살았고, 이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영국 선원들을 '라이미(Limey)'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괴혈병을 극복한 영국 해군은 마침내 전 세계 해상 패권을 손에 쥐게 됩니다.
이후 1920~1930년대에 이르러 헝가리의 생화학자 센트죄르지 얼베르트(Albert Szent-Györgyi)가 괴혈병을 막는 물질을 세포에서 최초로 분리해 냈습니다. 이 물질이 바로 '비타민C(아스코르브산)'로 명명되면서 인류는 괴혈병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해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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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임 에이드 (Limeade)의 뾰족한 연필심 모습 |
고기에는 비타민C가 없다? 우리가 몰랐던 반전 과학
흔히 비타민C는 과일이나 채소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선한 살코기와 동물의 내장에는 소량이지만 괴혈병을 예방하기에 충분한 양의 비타민C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항해 시대에 선원들은 왜 고기를 먹고도 괴혈병에 걸렸을까요? 정답은 그들이 신선한 고기를 먹은 것이 아니라, 몇 달 동안 소금에 절이고 말리는 과정에서 비타민C가 모두 파괴된 '육포' 위주로 먹었기 때문입니다.
탄수화물을 먹지 않고 고기만 먹는 식단(카니보어)에서도 흥미로운 과학적 사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비타민C(아스코르브산)는 놀랍게도 포도당(Glucose)과 분자 구조가 매우 비슷합니다. 그래서 세포 안으로 들어갈 때 동일한 이동 통로인 'GLUT 수송체'를 공유하며 서로 경쟁합니다.
일반적인 식단에서는 탄수화물(밥, 빵, 설탕 등)을 먹으면 몸속에 포도당이 넘쳐나게 됩니다. 이 포도당들이 통로를 먼저 선점해 버려 비타민C의 흡수가 방해를 받습니다. 따라서 과일이나 채소를 통해 비타민C를 많이 먹어주어야 합니다.
반면 카니보어 식단에서는 몸속에 경쟁자인 포도당이 없습니다. 통로가 텅 비어있기 때문에, 고기 속에 들어있는 아주 소량의 비타민C만으로도 100% 온전하게 세포로 흡수됩니다. 덕분에 채소나 과일을 먹지 않아도 괴혈병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라임 에이드(Limeade) 컬러 발색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니 이 상큼한 연둣빛이 단순한 색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 종이에 색칠해 보면 노란빛이 감도는 연두색이 보입니다. 질병을 극복한 라임의 싱그러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색상입니다.
화면에는 노란색으로 보이지만 실제 색칠한 종이는 노란빛을 띠는 정말 상큼한 연두색으로 느껴집니다. 노트북 화면 속의 종이에 실제 색칠한 종이를 대어보았습니다. 실제 종이는 연두색으로 보이고 화면은 노란색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형광등 아닌 자연광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색연필이 너무 예쁜 연두색이고 단단하고 무르지 않고 색칠은 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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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마다 다르게 표현되는 라임 에이드 (Limeade) |
마치며
요즘은 알약 하나로 비타민C를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좋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라임 에이드, 레모네이드 등을 만들어서, 청량함과 영양을 직접 느끼면서 채우고 싶습니다. 신선한 과일은 아니지만 냉장고와 레몬즙과 라임즙이 있습니다. 색연필의 컬러처럼 싱그러운 기분으로 라임 에이드를 만들어 먹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