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색연필 28번째 : 피스타치오 그린 (Pistachio Green) 색상 이름의 뜻

몇 년 전, 다이어리에 들어가는 정도의 간단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서 어려운 형편에 큰맘 먹고 구매한 520색 색연필 세트가 있습니다. 하지만 잘하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발전이 없는 제 모습에 실망하고 그림 그리기는 진작에 포기했습니다.

그동안 장식품처럼 진열만 해두었지만, 그대로 썩히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색연필 세트는 우리가 흔히 알던 노란색, 분홍색, 보라색이 아니라 처음 보는 이름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단어들을 직접 검색하고 공부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포스팅을 시작했습니다.

색연필 이름에 대해 조사해 올리는 글이지만, 색연필 정보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직접 찍은 실물 사진과 새겨진 숫자, 종이별 발색 테스트 사진도 같이 올렸습니다.

  • 오늘의 색상: 피스타치오 그린 (Pistachio Green)
  • 색연필에 새겨진 문자: 134 / G82
  • 종이별 실제 발색 테스트: 스타벅스 다이어리 / A4 용지 / 다이소 쇼핑 봉투 / 검은 도화지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브루트프너 (Brutfuner) 520 피스타치오 그린 (Pistachio Green) 컬러 색연필 사진. / A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in "Pistachio Green" placed horizontally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피스타치오 그린 (Pistachio Green)' 색연필 한 자루

저에게 피스타치오는 약간의 진입장벽이 있는 견과류입니다. 마트에서 자주 보이지도 않았고, 호두나 땅콩에 비해 가격도 비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피스타치오의 맛은 베스킨 라빈스 31에서 아이스크림으로 먹어본 맛이 전부입니다. 너무 달지 않으면서도 상쾌하고 맛있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색연필 이름인 피스타치오도 이야깃 거리가 많을 것 같아서 좀 더 찾아보았습니다.

피스타치오 이름과 '탁!'하고 열리는 소리? 


피스타치오라는 이름의 어원을 따라가 보면 고대 언어의 흥미로운 역사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 단어는 원래 '나무' 또는 '피스타치오 열매' 자체를 뜻하는 고대 페르시아어인  'Pista'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언어의 변화 과정: 고대 페르시아어 'Pista' →고대 그리스어 'Pistakion (피스타키온)' →라틴어 'Pistacium (피스타키움)' →이탈리아어 'Pistacchio (피스타끼오)'를 거쳐 지금의 영어식 표현인 Pistachio (피스타치오)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가설이 있습니다. '피스타'라는 고대 발음이 열매가 완전히 익었을 때 딱딱한 껍질이 저절로 '탁'하고 벌어지는 소리에서 따온 의성어라는 것입니다. '카이신궈 (개심과)'라고 부르는데, 번역하면 '입을 벌리고 웃는 열매'라는 뜻입니다. 사진으로 봤던 피스타치오와 정말 어울리는 뜻입니다.

사진 속의 색연필이 뽀얗고 예쁜데 느낌이 립스틱 삿 같습니다. 다만 입술이 아닌 색연필이고, 핑크색이 아닌 건강한 피스타치오 그린 컬러라는 점입니다. 묘하고 매력적인 컬러입니다.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 'PISTACHIO GREEN' 글자와 숫자 '134'이 각인된 브루트프너 (Brutfuner) 520 색연필 표면을 확대한 사진. / A close-up photo of the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surface inscribed with "PISTACHIO GREEN" and the number "134", placed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134, 'PISTACHIO GREEN'

다른 견과류와는 다른 초록빛의 비밀


우리가 흔히 아는 호두, 아몬드, 땅콩 같은 견과류는 보통 갈색이나 베이지색을 띱니다. 반면 피스타치오는 혼자만 고운 초록색입니다. 그 이유는 피스타치오 속에 가득 찬 식물의 천연 항산화 색소 성분 덕분입니다. 이 성분들이 바로 우리가 색연필로 마주하게 되는 '피스타치오 그린'의 따뜻하고 편안한 초록빛을 만드는 주인공인 것입니다.

시바 여왕이 법으로 금지한 맛


이렇게 매력적인 초록빛을 가진 피스타치오는 역사 속에서도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아주 옛날에 있었던 재밌지만 어이없는 에피소드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고대 시바 문명을 다스리던 시바 여왕은 피스타치오 특유의 맛과 향에 완전히 반했습니다. 여왕은 이 맛있는 열매를 오직 왕실과 상류 귀족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결국 여왕은 평민들이 개인적으로 피스타치오 나무를 재배하고 먹는 것을 법으로 금지까지 했습니다. 온 나라에서 수확된 피스타치오는 오직 왕실의 창고로만 들어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편하게 즐기는 피스타치오가 고대에는 먹기만 해도 감옥에 갈 수 있었던 평민들에게는 금지된 '왕실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것입니다.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 은박으로 'G82 / 520 colors'가 새겨진 브루트프너 (Brutfuner) 520 색연필 끝부분을 확대한 사진. / A close-up photo of the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end with "G8 2/ 520 colors" inscribed in silver foil, placed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반짝이는 은박 G82 / 520 colors

피스타치오가 비싼 과학적·기후적 이유


과거 시바 여왕이 독점했을 정도로 가치 있게 여겨졌던 피스타치오는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몸값이 비싼 편에 속합니다. 여기에는 과학적·기후적 이유가 있습니다.
  • 느린 재배 기간: 피스타치오 나무는 땅에 심고 나서 첫 열매를 구경하기까지 최소 5~6년이 걸립니다. 농부들이 제대로 된 대량 수확을 하려면 15년에서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 해거리 현상(Alternate-Bearing): 한 해에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면, 다음 해에는 수확량이 급감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생산량이 일정하지 않아 가격이 안정되기 어렵습니다.
  • 사막 기후와 까다로운 공정: 긴 여름은 극도로 덥고 겨울은 혹독하게 추운 특정 사막 기후에서만 자라며, 수확 후 일일이 선별하고 딱딱한 껍질을 가공하는 공정에도 많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 수급 불안정과 수요 폭발: 최근 전 세계적으로 피스타치오를 활용한 디저트의 인기로 수요는 폭발했는데, 주요 생산국의 가뭄과 공급망 차질이 겹치며 몸값이 그야말로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성경 속에 숨겨진 명품 특산물의 비밀


이렇게 귀하고 비싼 열매였으니,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인 성경에 등장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 창세기를 보면 야곱(이스라엘)이 극심한 가뭄과 흉년을 만나,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이집트)의 총리에게 아들들을 보내는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야곱은 냉랭한 총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이 땅의 제일 좋은 산물(명품 특산물)"을 정성껏 골라 예물로 보냈는데, 그 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 바로 피스타치오와 아몬드였습니다.

성경이 처음 조선에 들어왔던 때는 피스타치오와 아몬드가 없었기에, 번역가들이 가장 비슷하게 생긴 우리나라 식물의 이름을 빌려와 번역했습니다. '비자'와 '파단행'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지만, 최신 성경이나 영어 성경에는 역사적 고증을 거쳐 '피스타치오'와 '아몬드'라고 아주 명확하게 직역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 옅은 갈색의 나무 단면과 뾰족한 연필심이 선명하게 보이는 브루트프너 (Brutfuner) 520 피스타치오 그린 (Pistachio Green)의 촉 부분을 확대한 사진. / A close-up photo of the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tip in "Pistachio Green"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clearly showing the light brown wood grain and the sharpened pencil lead.
피스타치오 그린 (Pistachio Green)의 연필심

아몬드의 진실, 그리고 피스타치오의 무해함


최근 친환경이나 채식주의 (비건) 트렌드 속에서 아보카도와 아몬드의 대량 재배 방식이 큰 논쟁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 식재료들을 대량 생산하는 과정 중에 수많은 꿀벌이 인위적인 수분 작업에 동원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과도한 스트레스와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꿀벌 생태계가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성경에 등장했던 아몬드와 달리, 피스타치오는 꿀벌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피스타치오 나무는 곤충의 도움 없이 오직 '봄바람'의 힘으로만 꽃가루를 날려 열매를 맺는 100% 풍매화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먹거리를 위해 벌들을 장기간 이동시키며 스트레스를 주거나, 겨울잠을 깨워 가혹한 환경으로 몰아넣지 않는 견과류입니다.
종이에 피스타치오 그린 색연필로 칠해진 동그라미, 네모, 육각형 도형들. / Pistachio green color filled inside shapes including circles, squares, and hexagons.
부드러운 연둣빛, 피스타치오 그린의 매력

종이 위에서 피어나는 힐링 타임


이 색연필은 피스타치오 견과류의 단단한 껍질을 깠을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연두색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 특징입니다. 차분하고 온화한 연둣빛을 종이에 칠해 보는 것만으로도 일상 속에서 따뜻한 위로와 시각적인 편안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의 눈은 초록색 계열의 파장(약 510~550nm)을 바라볼 때 본능적으로 깊은 안정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가시광선의 중심에 위치한 이 파장대는 눈의 수정체 근육이 초점을 맞추기 위해 인위적으로 긴장하거나 힘을 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색을 입힌 종이나 자연의 초록색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친 눈의 피로를 완화하고 마음에 안정을 주는 데 긍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피스타치오 그린 (Pistachio Green) 발색 사진

피스타치오 그린 색연필로 여러 종이에 색칠해 보았습니다. 바라보는 눈이 편안하고, 색감이 너무 곱게 느껴져서 매력적입니다. 종이가 달라도 색의 차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검은 도화지에 묻히지 않고 색이 잘 느껴집니다.

서로 다른 질감과 색상을 가진 4가지 종류의 종이 위에 브루트프너 (Brutfuner) 520 피스타치오 그린 (Pistachio Green) 컬러 색연필로 선과 별 모양 등을 그리며 발색 테스트를 한 사진. / A photo of a color swatch test using the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in "Pistachio Green" on four different types of paper, showing various lines and star shapes.
종이마다 편안하게 표현되는 피스타치오 그린 (Pistachio Green)

글을 마치며


지금 당장 신선한 피스타치오를 자주 구매하기는 어렵지만, '피스타치오 그린' 컬러의 색연필을 활용해서 종이 위를 채워나가는 행동은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새롭게 알게 된 파스텔 그린 컬러와 피스타치오 그린 컬러 특유의 온화한 색감으로 지친 저의 오늘을 살짝 다독여 주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사놓기만 하고 그림이 어렵게 느껴져서 갖고만 있던 색연필이었습니다. 하지만 색연필 고유의 이름 뒤에 숨겨진 정보와 이야기를 찾아서 기록할 수 있어 좋습니다. 알차게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기분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