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 마젠타(TELE MAGENTA) | 핫핑크 속에 숨겨진 진짜 이름을 찾아서 - 520색연필 #24 (483 AL1401)

저에게는 나름 보물(?)이라고 할 만한 소장품이 하나 있습니다. 몇 년 전, 백수라서 주머니가 가벼웠음에도 불구하고 큰맘 먹고 충동구매했던 중국 브루트푸너(Brutfuner)사의 '520색 세트 색연필'입니다. 사실 그동안은 아깝다는 생각에 몇 개의 색연필만 색칠해 보고, 오랜 시간 장식품처럼 모셔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득 '색칠을 해야 진짜 색연필 역할을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된 색연필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어 그림 대신 단순한 색칠을 조금씩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520가지나 되는 다양하고 신기한 색연필 이름을 하나씩 알아가며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브루트프너(Brutfuner) 520 텔레 마젠타(Tele Magenta) 컬러 색연필 사진. / A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in "Tele Magenta" placed horizontally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텔레 마젠타(Tele Magenta)' 색연필 한 자루

'Tele Magenta' 이름에서 발견한 텔레비전의 뜻


오늘 기록할 색연필의 이름은 바로 '텔레 마젠타(Tele Magenta)'입니다. 처음에는 이름이 독특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단어를 검색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집에서 보는 '텔레비전'과 통신사를 듯하는 '텔레콤', 그리고 오늘의 단어인 '텔레 마젠타'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접두사 'Tele'가 모두 같은 뜻인 겁니다.

평생을 시청한 텔레비전이지만 뜻을 궁금해한 적은 없었는데, 뜻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Tele (그리스어): 멀리, 멀리 떨어진
• Vision (라틴어): 보다, 시야

즉, 두 단어가 합쳐져 "멀리 있는 것을 본다"라고 직관적으로 표현한 가전제품이 텔레비전이었습니다.

새롭게 알게 된 Tele를 대입해 보면, 텔레 마젠타는 "멀리 떨어졌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자홍색"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름이 평범하지 않고 멀리서도 꼭 알아봐야만 하는 뚜렷한 필요와 목적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 'TELE MAGENTA' 글자와 숫자 '483'이 각인된 브루트프너(Brutfuner) 520 색연필 표면을 확대한 사진. / A close-up photo of the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surface inscribed with "TELE MAGENTA" and the number "483", placed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483, 'TELE MAGENTA'

멀리서도 잘 보이게! 독일 산업 표준(RAL)의 비밀


검색을 하면서 제 추측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색상은 실제로 독일의 공식 산업용 색상 표준인 RAL 컬러 시스템에 등록된 'RAL 4010 Telemagenta'라는 역사 있는 색상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독일 RAL 규격에서 'Tele-'라는 접두사가 붙으면 "원거리에서도 뚜렷하게 식별이 가능한 공공 통신·신호·안전용 시설물"에 쓰이는 색상 군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철도 신호기나 도로 표지판 등은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봐야 안전사고를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원리로 원거리 신호용 회색은 '텔레 그레이(Telegrey)', 파란색은 '텔레 블루(Teleblue)'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눈에 띄어야 하는 'RAL 4010 텔레 마젠타' 색상은 과거 유럽의 공공 통신 인프라의 식별 색상으로 널리 쓰였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세계적인 통신 기업인 '도이치 텔레콤(Deutsche Telekom)'의 핵심 상징 색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회사는 글자나 로고가 없어도 "이 색상만 보면 우리 브랜드를 떠올릴 수 있다"라는 강력한 식별력을 인정받아, 법적으로 '색채 상표(Color Trademark)'를 등록해 두고 통신 분야에서 경쟁사들이 이 색을 쓰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독점하고 있습니다.

왼쪽에 마젠타 배경 위 화이트 'T' 로고와, 오른쪽에 푸른 하늘 아래 본사 건물 앞에서 휘날리는 실제 도이치 텔레콤 기업 깃발들이 결합된 이미지./A combined image featuring the white 'T' logo on a magenta background on the left, and actual Deutsche Telekom corporate flags flying in front of the headquarters building under a blue sky on the right.
푸른 하늘과 대비되는 텔레마젠타 컬러의 정석. 도이치 텔레콤(Deutsche Telekom) 미디어룸 공식 배포 자료

대반전: 내 색연필은 왜 핫핑크가 아니지?


하지만 이야기를 알아갈수록 저는 계속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가진 색연필은 핑크라고 말할 수 없는 컬러이기 때문입니다. 궁금증이 생겨 도이치 텔레콤의 마젠타 사진을 찾아봤는데, 제 색연필의 실제 발색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직접 종이에 색칠을 해보아도 이 색은 강렬한 핫핑크가 아니었습니다. 핑크는 아니지만 칠하면 칠할수록 먼저 칠한 곳과 뒤에 칠한 곳의 느낌이 달라지면서 은은한 반짝임이 돌았습니다. 오묘하고 아름다운 은빛이 반짝이는 갈색이나 금갈색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런 색깔의 머리칼이면 정말 예쁘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봐도 핑크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알려진 실제 색상과 색연필의 실제 발색이 너무 달랐기에 여러 번 검색해 보았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색연필 회사가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착각하여 엉뚱한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 은박으로 'AL1401 / 520 colors'가 새겨진 브루트프너(Brutfuner) 520 색연필 끝부분을 확대한 사진. / A close-up photo of the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end with "AL1401 / 520 colors" inscribed in silver foil, placed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반짝이는 은박 AL1401 / 520 colors

데이터베이스가 낳은 오류와 숨겨진 진짜 이름


제가 그동안 520색 세트 색연필을 포스팅하느라 단어들을 검색하면서, 마음 한편으로 이 색연필 회사가 색채 회사인 팬톤의 컬러 칩을 기반으로 제품을 만든 게 아닐까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텔레 마젠타'를 알아보느라 더 깊게 알아보면서, 그동안 가졌던 의심은 100%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독일 산업 규격 RAL 4010: Telemagenta (자홍색 / 핫핑크)
•세계 색채 표준 PANTONE 4010 C: 별도 이름 없음 (숫자 자체가 고유명사) 

재미있게도 팬톤 4010 C 컬러는 오렌지(Orange) 군에 속합니다. 팬톤의 기술 문서나 전문 도료 매칭 시스템(MyPerfectColor 등)에서는 이 색상을 '선명하고 따뜻한 황 오렌지색(Vivid, warm yellow-orange)' 또는 특유의 질감을 살려 '구리 및 청동색(Copper/Bronze)' 계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 추리가 더 확실하다고 느낀 것은 팬톤의 4000번대(Pantone 4000 series)는 그냥 일반 평범한 갈색이 아니라, 반짝이는 금속 가루가 들어간 '메탈릭 코팅(Metallic Coated)'시리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색칠하면서 느꼈던 오묘한 아름다움과 반짝임의 정체가 바로 메탈릭 성분 덕분이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색연필 제조 회사에서 제품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때, "4010"이라는 숫자 코드만 보고 고유 이름이 없던 팬톤 컬러에 독일 RAL 4010 규격의 이름인 'Telemagenta'를 그대로 긁어와 실수로 매칭해 버린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짜 텔레 마젠타 이름표를 달고 있는 색연필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요? 저는 색칠하면서 느낀 것과 팬톤을 참고해서 '메탈릭 구리색'이나 '메탈릭 동전 색'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심이 단단하고 무르지 않아 색칠도 잘 되고 검은색 도화지에서도 빛을 발하는 너무 아름다운 컬러의 색연필입니다.

서로 다른 질감과 색상을 가진 4가지 종류의 종이 위에 브루트프너(Brutfuner) 520 텔레 마젠타(Tele Magenta) 컬러 색연필로 선과 별 모양 등을 그리며 발색 테스트를 한 사진. / A photo of a color swatch test using the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in "Tele Magenta" on four different types of paper, showing various lines and star shapes.
종이 종류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텔레 마젠타(Tele Magenta)의 매력

마치며: 520색 발색 표를 만들다가 찾은 미스터리


이름이 특이한데 하고 생각한 색연필인데 텔레비전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짜 텔레 마젠타 컬러도 알게 됐고, 그동안 의심했던 팬톤 시스템을 기반으로 제품을 만들었다는 확신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색연필을 처음 샀을 때 전 색상을 종이에 색칠하면서 발색 표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엄청 어이가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유가 똑같은 색연필이 2개 중복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즉 520개의 색연필이지만 실제 컬러는 519개뿐이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색이 없는 것인지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봤지만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제품은 2개의 종이 박스에 나눠져 있었습니다. 얇은 플라스틱 판에 26개씩  나란히 꽂혀 있습니다. 지금은 겨우 첫 번째 판을 붙잡고 포스팅하는 중이라 계속 보다 보니 질릴 지경입니다. 이렇게 한 색깔씩 포스팅을 이어가다 보면 머리에 정보가 남게 될 것이고 어떤 색이 없는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속이 뻥하고 뚫릴 것 같습니다. 그 통쾌한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며 포스팅을 이어 나가겠습니다.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 옅은 갈색의 나무 단면과 뾰족한 연필심이 선명하게 보이는 브루트프너(Brutfuner) 520 텔레 마젠타(Tele Magenta)의 촉 부분을 확대한 사진. / A close-up photo of the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tip in "Tele Magenta"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clearly showing the light brown wood grain and the sharpened pencil lead.
텔레 마젠타(Tele Magenta)의 연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