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ORA(오로라) 숨겨진 신화 이야기 (520 색연필 #4)

몇 년 전, 백수 시절에 큰맘 먹고 520색 색연필 세트를 샀습니다. 당시 우울한 기분에 "그림을 그려보자. 안 되면 그냥 종이에 색칠이라도 해보자. 예쁜 색들을 보면서 힐링하자."라는 마음으로 구매했던 제품입니다.

하지만 결국 몇 번 그림을 그리지도 못했고 그냥 막 칠하기에는 색연필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책상 위에만 머물던 색연필들이 아깝고 불쌍한 기분도 들어서 나만의 기록으로 남겨보려 합니다. 오늘 4번째 기록으로 남기는 색연필의 이름은 'AURORA(오로라)'입니다.

520 색연필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오로라 색상의 제품 전체 사진. / A full shot of the 520 colored pencil in aurora color placed horizontally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520 색연필 #4 오로라 색연필 전체

1. 오로라 색연필: 왜 초록색이 아니라 노란색일까?

보통 우리가 '오로라'라고 하면 밤하늘을 수놓는 초록색이나 보라색의 신비한 빛줄기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제가 가진 520 색연필 세트 속 'AURORA'는 초록색이 아니라 노란색에 가까워서 검색을 해봤습니다.

아우로라(Aurora)의 어원은 라틴어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 Aur- (오르): 라틴어로 '새벽빛', '동틀 무렵의 빛'을 뜻하는 어근
  • -ora (오라): '시간'을 뜻하는 단어 (Hora)에서 유래
  • 결론: 즉, 아우로라(Aurora)는 글자 그대로 '새벽의 시간', 혹은 '새벽빛이 떠오르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제조회사에서도 이 어원을 살려서 노란색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520 색연필 숫자 11과 은박 AURORA 문구가 새겨져 있는 몸통 클로즈업 사진. / A close-up of the 520 colored pencil body engraved with the number 11 and silver foil AURORA.
520 색연필 11 AURORA 각인

2. 신화 속 새벽의 여신: 에오스와 아우로라

이 이름은 그리스·로마 신화 속 여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신화 속 원조 이름은 '에오스(Eos)'였습니다. 에오스는 매일 아침 분홍빛 마차를 타고 밤의 장막을 걷어내며, 오빠인 태양신 헬리오스가 지나갈 길을 열어주는 감성적인 여신이었습니다. 이 여신이 로마 신화로 넘어가면서 우리가 잘 아는 '아우로라(Aurora)'로 불리게 됩니다.

3. 에오스의 치명적인 약점: 아프로디테의 저주

그리스인 신화 속 에오스는 사랑에 목숨을 거는 열정적인 사랑꾼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아 끊임없이 인간 남성과 지독한 사랑에 빠지는 숙명을 지녔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남자가 바로 트로이의 잘생긴 왕자, '티토노스(Tithonus)'였습니다.

인간인 연인이 늙어 죽는 게 두려웠던 에오스는 제우스를 찾아가 간절히 빌었습니다.

"제 연인 티토노스에게 영원한 삶을 주세요."

제우스는 청을 들어주었지만, 에오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죽지 않는 '영원한 삶'만 구하고, 늙지 않는 '영원한 젊음'을 함께 구하는 것을 깜빡한 것입니다.

에오스는 신이었기에 젊은 모습을 유지했지만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인 남편은 늙어갔습니다. 주름이 늘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 가고, 몸은 쪼그라들어 웅얼거리는 남편을 에오스는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에오스는 결국 그를 한 마리의 곤충으로 바꾸어 버렸는데, 그것이 바로 '매미'입니다. 매미가 여름 내내 목놓아 우는소리는 , 사실 티토노스가 아내 에오스에게 나를 다시 젊게 해달라거나,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슬픈 울음소리라는 신화가 전해집니다.

520 색연필 은박으로 Y61 520 colors 문구가 새겨져 있는 끝부분 클로즈업 사진. / A close-up of the 520 colored pencil body engraved with silver foil Y61 520 colors text.
520 색연필 Y61 /520 colors


520 색연필 분홍색 배경 위 오로라 색상 몸통과 옅은 갈색 연필심이 보이는 끝부분 클로즈업 사진. / A close-up of the 520 colored pencil featuring an aurora-colored body and a light brown tip on a pink background.
520 색연필 AURORA 연필심

4. 로마 제국에서 재해석된 성실한 여신

이후 그리스 시대가 저물고 로마 제국이 건설되었습니다. 여신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의 성향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의 아우로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한 '성실하고 우아한 시간의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밤하늘의 신비로운 천문 현상에 '오로라'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 우아하고 밝은 이미지 덕분입니다.
  • 그리스인(감성적이고 드라마틱): 사랑 이야기를 좋아해 에오스를 감정적인 사랑꾼으로 묘사.
  • 로마인(이성적이고 성실): 규율과 질서를 중시해서 아우로라를 매일 아침 성실하게 출근하는 커리어 우먼으로 재해석.

5. 아침이슬에 숨겨진 또 다른 슬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보면 이 성실한 여신의 슬픔이 아주 나옵니다. 로마인들은 매일 아침 풀잎에 맺히는 '아침이슬'을 아우로라 여신이 늙어버린 남편 티토노스를 보며, 그리고 훗날 전쟁에서 잃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흘리는 눈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새벽을 열어야 하기에 늘 출근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520 색연필 네 가지 종류의 종이 위에 오로라 색상으로 선과 별 모양을 그려 테스트한 발색 사진. / A color swatch test of the 520 colored pencil in aurora color showing lines and star shapes on four different types of paper.
520 색연필 종이 재질별 오로라 발색 비교 (심이 단단하고 무르지 않은 질감)

6. 마치며: 여신의 삶을 바라보며

오로라의 역사를 한 번에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스 시대: 원조 새벽의 여신 '에오스(Eos)'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

2. 로마 시대: 로마가 그리스 신화를 흡수하며 '아우로라'로 개명. 성실하고 우아한 이미지로 재해석.

3. 현대: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밤하늘의 신비로운 빛, '오로라'.

결국 시대와 발음은 다르지만 모두 '새벽의 여신' 한 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 책상 위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는 노란색 색연필 하나 덕분에, 매일 아침 눈물(이슬)을 흘리며 성실하게 새벽을 열었던 여신의 깊은 슬픔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이 여신에게 이런 비극적인 이야기를 씌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여신이라고 해도 결국 본질은 사람이 쓴 이야기입니다. 사람한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여신도 사랑을 하고, 자기의 남자친구나 남편을 위해 신에게 빌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저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고, 애쓰고 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을 정말 싫어하지만, 옛말은 다 맞는 거 아닌가요? 왜 나에겐 아무도 없는 것인지 많이 쓸쓸한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