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트 오렌지(BRIGHT ORANGE), 굴뚝에서 구조된 여인의 반전 스토리 2편 (520 색연필 #12)

저에게는 520 세트의 색연필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BRIGHT ORANGE(브라이트 오렌지'라는 색상을 검색하다가 한 장의 그림을 발견하고 포스팅을 올렸습니다. 

브라이트 오렌지 컬러로 연결된 이 그림과 그림을 그린 화가, 모델에 얽힌 이야기들이 너무 방대하고 놀라운 사연들을 담고 있어 1편으로 마무리가 되지 않아 이렇게 2편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차가운 굴뚝 속에서 부활해 기록한 말도 안 되는 위대한 업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520 색연필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브라이트 오렌지 색상의 제품 전체 사진 2편. / A full shot of the 520 colored pencil in Bright Orange color placed horizontally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for Part 2.
520 색연필 브라이트 오렌지 색연필 제품 사진 2편


굴뚝 벽 속에서 구조된 브라이트 오렌지 드레스의 여인

1962년의 어느 날,  영국 런던 남부 클래펌 커먼(Clapham Common) 지역의 한 낡은 주택을 철거하던 인부가 부서진 벽면 뒤, 굴뚝 벽난로 기둥의 나무 패널 안쪽 숨겨진 공간에서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상자 속에는 두꺼운 천으로 꼼꼼하게 밀봉된 그림이 들어 있었습니다. 세계대전의 포화를 피해 집주인이 깊숙이 숨겨놓았던 이 걸작은, 주인을 잃고 오랜 세월 실종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였습니다. 드디어 브라이트 오렌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철거 인부는 미술품을 보는 안목이 없었습니다. 그저 '액자가 돈이 되겠다' 싶어, 당시 런던 배터시 골목에 있는 액자 가게 겸 골동품 상점에 단돈 50파운드(당시 가치로 몇십만 원)를 받고 이 그림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이 인부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1년 후 이 작품의 가치를 알아 본 한 갤러리 관장이 영국의 국립 미술관에 판매 의사를 밝혔을 때, 주류 미술계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제 발로 내쳤기 때문입니다. 굴뚝 벽 속에서 구조되었지만, 이 오렌지빛 그림은 또다시 1년 동안 런던의 차가운 뒷골목과 이발소 구석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문 미술상 제레미  마스가 구매한 가격의 비밀

1963년, 드디어 이  그림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빅토리아 시대 고전 미술 전문 갤러리를 갓 오픈했던 제레미 마스(Jeremy Maas)였습니다. 그는 길을 지나가다가 골동품점 창가에 방치되듯 걸려 있는 이 작품을 발견하자마자 한눈에 보물임을 직감하고 즉시 구매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자신이 이 그림을 얼마에 구매했는지에 대해서는 평생 철저히 비밀에 부쳤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얼마나 싸게 샀길래 창피해서 숨기는 걸까?'싶지만, 여기에는 평범한 이들은 쉽게 알 수 없는 미술 시장의 철저한 비즈니스적 이유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1. 철저한 상업적 마진 보호: 미술상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중개업자입니다. 런던 뒷골목에서 고작 몇십 파운드에 주워왔다는 사실이 시장에 알려지면, 훗날 부유한 수집가들에게 높은 가격에 되팔 때 엄청난 가격  저항을 받게 됩니다.

2. 명화의 고귀한 품격 유지: 헐값에 뒷골목에서 구매했다는 흔적을 지우고 작품의 신비주의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미술 시장에서 가격은 곧 작품의 '계급'이 되기 때문에, 그림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역경의 역사가 있기에 이  그림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고, 물론 없었어도 좋아했을 것입니다.)

3. 전문가로서의 명성 방어: 제레미 마스는 갤러리를 막 오픈한 전문가였지만, 주류 미술계에서는 아직 신인이었습니다. 자칫 보수적인 학계로부터 '고물상'이나 '장물아비'같은 비아냥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학술적 명성과 안목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철저히 함구한 셈입니다. 비록 구매 가격은 숨겼을지언정, 그는 오직 자신의 지식과 선견지명으로 흙 속의 진주를 찾아낸 위대한 미술상이었습니다.


520 색연필 숫자 507과 은박 BRIGHT ORANGE 문구가 새겨져 있는 브라이트 오렌지 색연필 몸통 클로즈업 사진 2편. / A close-up shot of the orange colored pencil body showing the engraved color number 507 and silver foil BRIGHT ORANGE lettering for Part 2.
520 색연필 507 BRIGHT ORANGE 각인 2편


영국의 국립 미술관들이 저지른 역사적인 실수와 오만함

1963년, 그림을 구매한 제레미 마스는 영국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국립 미술관들(테이트 브리튼 등)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이 귀한 그림을 미술관 측에 판매 제안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주류 미술관들은 냉소적인 태도로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당시 1960년대 미술계는 앤디 워홀의 파격적인 팝아트와 피카소의 현대 미술, 그리고 거친 추상화에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앤디 워홀의 실크 스크린 작품이나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을 단 한 번이라도 보신 분이라면, 이 오렌지빛 걸작이 당시 유행과 얼마나 극단적으로 다른 방향의 작품이었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세계가 워홀의 상업주의와 파격에 취해 있던 시대였기에, 주류 학자들의 눈에 이 그림이 가진 정교한 고전미와 전통적인 아름다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그저 지나간 옛날 그림으로만 취급하며, 유행과 다른 결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고 해서, 혹은 지금 유행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사물이 가진 진짜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취향과 트렌드는 시대에 따라 계속해서 변하지만, 진짜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영원히 아름다울 뿐입니다. 세기의 대작을 눈앞에서 내쳤던 이 사건은, 자신들의 취향이 가장 트렌디하며 자신들의 평가가 절대적 기준이라 자만했던 주류 미술계의 '오만함'이 낳은 역사적' 비극이었습니다.

유행 넘어선 확신, 2000파운드의 기적과 새로운 집

유행에 눈이 먼 영국 미술계가 세기의 대작이라 칭할 수 있는 이 그림을 직접 내던졌을 때, 이 기회를 기적처럼 알아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푸에르토리코의 대부호이자 정치인이었던 루이스 A. 페레(Luis A. Ferré)였습니다. 1963년, 그는 단돈 2,000파운드(당시 약 5,600달러)라는 말도 안 되는 헐값에 이 거대한 보물을 손에 넣었습니다.

루이스 페레는 단순한 자산가를 넘어 진정한 안목을 가진 수집가였습니다. 뜨겁던 여름날, 런던 제레미 마스 갤러리 창가에서 이 눈부신 브라이트 오렌지빛 작품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고향 사람들을 위한 자신의 재산으로 공공 미술관을 짓는 중이었습니다. 재단 이름으로 이 그림을 즉시 매입해 미술관의 이름으로 소장했습니다.

1965년 12월 28일, 마침내 완공된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정중앙 자리에 이 작품이 걸렸습니다. 차가운 굴뚝 벽 속에 갇혀 사라졌다가 탈출한 지 3년 만에, 타국 땅에서 비로소 완벽한 제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사익보다 예술을 먼저 생각한 페레의 결단 덕분에, 푸에르토리코 시민들은 역사적인 명작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노트북 화면으로 이 눈부신 오렌지빛 그림을 보게 된 저도차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당시 미술관에서 실물 그림을 직접 맞닥뜨린 관객들이 받았을 시각적 충격과 감동은 감히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눈앞을 가득 채운 타오르는 듯한 색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마주하며 느꼈을 벅찬 울컥함은, 제가 어제 느꼈을 감동의 수천 배는 거뜬히 뛰어 넘었을 것입니다.


520 색연필 은박으로 L11/ 520 colors 문구가 새겨져 있는 브라이트 오렌지 색연필 끝부분 클로즈업 사진 2편. / A close-up shot of the orange colored pencil end showing the silver foil L11/520 colors lettering for Part 2.
520 색연필 L11 /520 colors 2편


주류 미술계의 뒤늦은 '뒷북 반성'과 외면

참으로 씁쓸하게도, 1965년 푸에르토리코 미술관에 이 그림이 걸린 이후 무려 13년 동안이나 영국과 뉴욕의 주류 미술계는 여전히 오만함에 빠져있었습니다. 1965년부터 1978년까지 영국의 왕립 미술원이나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 소속 평론가들이 발행한 수많은 저널 중에서, 이 위대한 걸작을 언급한 논문이나 칼럼은 단 한 편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푸에르토리코는 '예술이 존재할 수 없는 변방의 섬나라'일뿐이었습니다. 1963년에 제레미 마스의 판매 제안을 예산 부족과 미술사적 가치 미달을 이유로 냉정하게 거절했던 그들에게, 이 그림은 이미 지나간 옛 유행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철저한 무시와 외면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아름다움은 무시한다고 가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78년이 되자, 서양 미술계 전역에 푸에르토리코 폰세 미술관에 소장된 엄청난 고전 명화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영국의 유명 평론가들과 미술 대가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폰세 미술관을 방문하기에 이릅니다.

1978년, 오만한 미술계가 마주한 비주얼 쇼크

미술관 정중앙에 걸려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이 오렌지빛 그림자의 압도적인 실물을 마주한 평론가들은 집단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공적인 트렌드에 갇혀있던 그들의 눈에, 자연의 생명력을 가득 담은 브라이트 오렌지빛의 에너지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뼈아픈 후회와 역사적 반성

자신들이 앤디 워홀과 피카소라는 당대의 유행에 눈이 멀어, 단돈 2,000파운드라는 헐값으로 멀리 떨어진 섬나라의 가장 위대한 보물이 되어 있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안목이 틀렸음을 가장 적나라하게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역사적인 1978년을 기준으로 주류 미술계의 철저한 반성과, 그동안 소외되었던 빅토리아 고전 미술에 대한 대대적인 재평가가 시작되었습니다. 유행은 잠시 머물다 가지만,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시공간을 초월해도 반드시 제 자리를 찾아 부활한다는 것을 이 위대한 걸작은 스스로 증명해 낸 것이었습니다.

2026년 현재, 전 세계를 치유하는 오렌지빛 뮤즈와 기적의 여정

2016년, 《타오르는 6월》은 화가 프레데릭 레이턴 경의 생가이자 현재는 미술관이 된 런던의 '레이턴 하우스 박물관(Leighton House Museum)'에서 《아이콘의 탄생(The Making of an Icon)》이라는 특별 전시회를 통해 무려 121년 만의 금의환향을 이루어냈습니다. 작품이 처음 태어났던 바로 그 화실 벽으로 정확히 돌아와 걸린 기적같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틱한 브라이트 오렌지빛 여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인 푸에르토리코에 2020년,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폰세 미술관의 건물에 큰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2026년 현재까지도 미술관의 대대적인 보수와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미술관 측은 그림의 안전을 염려해 본관에 작품을 둘 수 없었고, 이을 계기로 전 세계를 순회하는 대대적인 글로벌 대여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1962년 어두운 굴뚝에서 구조되었던 《타오르는 6월》은, 현재 전 세계를 감동시키는 위대한 여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유행에 눈이 멀었던 영국과 뉴욕의 심장부를 거쳐, 다가오는 2026년 6월 20일부터 9월 20일까지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미술관(OKCMOA)에서 열리는 《미의 감각(The Sense of Beauty)》 특별전을 통해 수많은 글로벌 관람객들을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유행은 몇 년 만에 변하지만, 거장이 아픈 몸으로 목숨을 갈아 넣은 진짜 '아름다움'의 가치는 시간도 뛰어넘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타오르는 6월(Flaming June)》이 증명해 내고 있습니다.


영국 화가 프레더릭 레이턴 경의 명화 타오르는 6월(Flaming June). 선명한 주황색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소파 위에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채 잠들어 있고, 배경에는 석양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다가 묘사되어 있다 2편. / The famous painting 'Flaming June' by British artist Sir Frederic Leighton. It shows a woman sleeping in a curled position on a couch, wearing a vivid orange sheer silk dress, with a golden sea glowing under the sunset in the background for Part 2.
프레더릭 레이턴 경의 '타오르는 6월' 혹은 '불타는 6월'

마치며

저는 이번 블로그 포스팅을 위해 자료를 찾고 글을 쓰면서 몇 번이나 울컥했는지 모릅니다. 차가운 굴뚝 벽 속에서 발견됐고, 다시 1년 동안 뒷골목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겨우 안목을 가진 사람을 만났나 싶었는데 주류 미술계의 외면을 당해 타국으로 가야 했습니다.

어쩌다가 검색한 색연필 컬러로 제 눈과 마음을 완전히 홀려버린 이 아름다운 명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고 재밌습니다. '브라이트 오렌지' 색연필 한 자루로 화가도 알게 됐고 실종되었던 일, 무사히 구출되어 전 세계에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냥 색연필 색상 검색하다가 생긴 이 일들이 저에게 너무 특벽한 일이었기에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서 기쁩니다. 예쁜 컬러가 그에 맞는 예쁜 일을 해주었습니다!

520 색연필 분홍색 배경 위 브라이트 오렌지 색연필 몸통과 옅은 갈색 연필심이 보이는 끝부분 클로즈업 사진 2편. / A close-up shot of the sharpened tip of the orange colored pencil showing the light brown wood and orange core on a pink background for Part 2.
520 색연필 브라이트 오렌지 연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