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임 스칼렛(FLAME SCARLET) | 팬지가 될 뻔했던 스칼렛 오하라 (520 색연필 #19)
'플레임 스칼렛(Flame Scarlet)'이라는 색을 아시나요? 처음 이 이름을 들었을 때 색상 이름이 진짜 다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TV에서 본 것 같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자연스럽게 생각났습니다.
플레임 스칼렛으로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점 중에 하나는 '스칼렛'이 컬러 '레드'를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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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임 스칼렛(Flame Scarlet)' 색연필 한 자루 |
스칼렛(Scarlet)은 무슨 뜻일까?
우리가 흔히 아는 스칼렛(Scarlet)은 본래 붉은색 중에서도 노란빛이나 주황빛이 살짝 감도는 밝은 레드 컬러를 뜻합니다. 즉, 아주 선명하고 밝은 '다홍색'이나 '주홍빛 레드'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타오르는 '불꽃'이나 '불길'을 뜻하는 플레임(Flame)이라는 단어가 더해지면 어떨까요? 어두운 핏빛 레드가 아니라, "지금 막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의 중심부처럼 강렬하고 밝은 빛을 내는 다홍색'이라는 직관적이 이미지가 머릿속에 바로 그려집니다. 영화 속 명대사인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를 외치던 스칼렛 오하라의 강인한 이미지와도 무척 잘 어울리는 색상입니다.
사실 천 이름이었던 스칼렛
그런데 영화 속 주인공 이름이자 이 매력적인 색상 이름인 '스칼렛'은 과거에 최고급 천(직물)을 뜻하는 단어였습니다.
'스칼렛'이라는 단어의 뿌리는 고대 페르시아어인 '사칼라트(Saqalat)'로, 중세 유럽에서는 '매우 부드럽고 비싼 최고급 양모 천'을 의미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은 이 귀하디귀한 천에 그 가치에 걸맞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곤충 염료를 사용해 '눈부시게 빛나는 빨간색'으로 염색을 했습니다. 워낙 귀한 천과 최고급 빨간 염료가 늘 세트처럼 붙어 다니다 보니, 사람들은 어느새 이 최고급 직물의 이름이었던 '스칼렛'을 선명하고 화려한 빨간색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운명 같은 매치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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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9, 'FLAME SCARLET' |
스칼렛 오하라가 아니라 원래 '팬지 오하라' 였다고?
위에서 언급한 '스칼렛'이 나오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아시는 분이 많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영화 전에 소설이 원작이고, 책이 출판되기 전까지 주인공의 이름은 '스칼렛'이 아니라 '팬지'였다고 합니다. 출판사와 편집자는 계속 이 이름을 반대했었고, 결국 작가를 설득해 '팬지 오하라'가 아닌 '스칼렛 오하라'로 출판되었습니다. '팬지'가 어때서 반대했던 걸까요?
1. 1930년대 미국을 뒤흔든 '팬지(Pansy)'의 진짜 의미
우리에겐 그저 귀여운 꽃 이름처럼 다가오는 '팬지'라는 단어는, 소설이 출판되던 1930년대 미국에서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전역에서 '팬지'는 '나약하고 겁 많은 남자' 혹은 '여성스러운 남성(성소수자)'을 비하하는 비속어로 급격하게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책을 출판하기 직전, 출판사는 발칵 뒤집히는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화려했던 지하 문화, '팬지 크레이지(Pansy Craze)'와 금주법
꽃 이름이 어쩌다가 성소수자를 비하하는 단어가 되었을까요? 사건의 발단은 1920년대 미국의 '금주법 시대'였습니다.
법으로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자 뉴욕과 시카고 등 대도시 지하에는 '스피크 이지(Speakeasy)'라 불리는 불법 비밀 클럽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단속을 피해 숨어든 이 어두운 지하 세계에서는 당시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독특하고 화려한 쇼들이 많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것이 바로 남성 예술가들이 화려한 드레스와 화장을 한 채 무대에 서는 '드랙 쇼(Drag Show)'였습니다. 당시 이 화려한 남성 음악가와 예술가들을 통칭해 '팬지'라고 불렀으며, 이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열풍을 팬지 크레이지(Pansy Craze)'라고 부릅니다.
3. 대공황의 시작, 대중문화의 아이콘에서 혐오의 대상으로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화려한 밤 문화는 순식간에 몰락했습니다. 1930년대 중반, 금주법이 폐지되고 설상가상으로 경제 대공황이 찾아오면서 미국 사회는 급격히 보수화되었습니다.
정부와 경찰은 지하 클럽들을 단속하고 폐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대중 문화의 아이콘이었던 '팬지'라는 단어는 순식간에 "남자답지 못한 유약한 겁쟁이"를 뜻하는 비하와 혐오의 단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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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짝이는 은박 R16 / 520 colors |
4. 출판사를 경악하게 만든 타이밍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출판된 해는 바로 이 혐오 열풍의 끝자락이었던 1936년이었습니다.
만약 작가의 고집대로 '팬지 오하라'라는 이름으로 책을 출판했다면 어땠을까요? 지금의 대중들이라면 단순한 '기싸움'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대중들은 소설을 읽기도 전에 "밤거리 불법 클럽에서 남자가 여자로 꾸미고 춤추고 노래하는 이상한 캐릭터"라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렸을 것이고, 소설을 읽기도 전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됐을 것입니다. 미국 남부의 거친 역경을 헤쳐 나가는 당찬 여주인공의 모습은 당시 사회에서 팬지에 가려져 곧바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주변의 끈질긴 설득 끝에, 출판 직전 '팬지'는 불꽃처럼 강렬하고 선명한 다홍빛 레드를 뜻하는 '스칼렛'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신의 한 수였던 이름 변경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당당하고 매력적인 '스칼렛 오하라'를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하필 끝까지 '팬지'를 고집했을까요?
작가 마가렛 미첼은 골수 남부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북부 도시 사람들은 전혀 몰랐던 남부인만의 정서와 반전 꽃말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생각'을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꽃말
프랑스어 '팡세(Pensée, 생각)'에서 유래한 팬지 꽃의 실제 꽃말은 '나를 생각해 주세요', '사색', '깊은 생각'입니다. 주인공의 내면이 깊은 고뇌를 품은 입체적인 인물임을 암시하는 장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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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임 스칼렛(Flame Scarlet)의 연필심 |
작가는 뉴욕의 유행을 모르는 골수 남부인
'팬지'가 성소수자나 유학함을 뜻하는 은어로 대유행한 곳은 뉴욕(브로드웨이) 중심의 북부 대도시였습니다. 인터넷은 꿈도 못 꿀 시절이라 지금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평생을 남부에서 자란 작가에게 팬지는 그저 각 가정의 정원에 예쁘게 피어나는 흔하고 친숙하지만 아름다운 꽃일 뿐이었습니다.
외유내강, 겨울을 뚫고 피어나는 팬지의 생명력
사실 팬지는 식물학적으로는 엄청난 반전 매력을 가진 꽃입니다. 보기에는 갸냘프고 화려한 온실 속 화초 같지만, 실제로는 영하의 추운 겨울철을 뚫고 가장 먼저 피어나는 엄청난 생명력을 품은 야생화인 것입니다.
작가는 바로 이 점에 주목했습니다. 평화로울 때는 드레스를 입고 화려함을 뽐내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자 혹독한 시련을 버텨내며 살아남는 여주인공의 '외유내강' 성격을 나타내기에 팬지만큼 완벽한 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책을 대량으로 인쇄하고 판매해야 하는 출판사의 강력한 설득과 반대로 인해, 결국 작가도 책의 성공을 위해 양보하면서 우리가 아는 '스칼렛 오하라'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플레임 스칼렛 색연필, 주황빛이 보일까요?
맨 위 종이는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자른 종이입니다. 종이도 색칠한 것도 따뜻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주황빛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래 A4종이에도 그냥 빨간색으로 오리지널 레드에 가깝게 표현됩니다. 갈색 종이에도 붉게 느껴지고 검은색 도화지에는 색연필로 칠한 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글로 표현되는 '플레임 스칼렛'이 어떤 느낌이든 제가 갖고 있는 색연필은 이렇게 표현됐습니다. 전 포스팅의 색연필들은 이름에 '레드'가 들어갔어도 노란 종이에서는 주황빛이 느껴졌습니다. 전의 색연필과 느낌이 다른 것이 좋고 빨간 플레임 스칼렛 색연필이 너무 맘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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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 종류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플레임 스칼렛(Flame Scarlet)의 매력 |
마치며: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스칼렛 오하라'의 용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영화를 안 보신 분들도 붉은 태양을 배경으로 외치던 이 유명한 명대사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Tomorrow is another day!)"
'플레임 스칼렛' 색연필 때문에 여러 검색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건, 다시는 굶지 않겠다는 스칼렛의 다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다이어트 목적의 굶주림이 아니라, 정말 먹을 것이 없어서 마주해야 했던 생존의 공포. 먹을 것이 없어 굶어야 한다면 인간성도 상실할 것 같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설산에 고립된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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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 저작권 만료 퍼블릭 도메인 |
전쟁과 대기근이라는 참혹한 역경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스칼렛의 성격은 결코 평범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그녀를 독하고 억척스럽다고 말할지 몰라도, 그 밑바탕에 깔린 삶에 대한 강인한 집착과 꺽이지 않는 용기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련 앞에서도 당당하고 강하게 대처했던 스칼렛의 태도를 너무나 닮고 싶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렬한 생명럭을 품은 '플레임 스칼렛'. 여러 비하인드를 알고 나니, 색연필의 붉은 컬러가 너무도 완벽하고 아름다운 컬러이자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