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형제 원작 '개구리 왕자'의 반전 이야기와 황금공의 비밀
며칠 전에 도서관에 갔다가 '그림형제 민담집'을 빌려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접한 아름답고 환상적인 디즈니 스타일의 동화가 아니라, 수백 년 전 처음에 이야기가 수집되었던 때와 비슷한 원형을 담고 있다고 해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동화로 각색된 이야기와 원작이 뭐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가면 읽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은 것이 아까워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봅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개구리 왕자'입니다. 제일 첫 번째 이야기여서 읽었는데, 로맨틱한 동화와는 달리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포인트들이 참 많았습니다.
1. 황금으로 만든 공? 공주는 들 수도 없는데!
이야기의 시작부터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설정이 나옵니다. 공주가 가장 아끼는 장난감이 '황금 공'이라고 합니다. 그림형제가 이야기를 수집하던 때는 고무 소재는 없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순금 공이라면 가지고 놀기는커녕 너무 무거워서 들지도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민담 속 '황금 공'은 진짜 순금 덩어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중세 시대 귀족들이 쓰던 가죽 공이나 나무 공에 금박을 입히거나 화려한 황금색 칠을 한 공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민담 속 다른 동물 가죽공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왕실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금빛 장난감'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무거워서 못 들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진짜 공주님이 가지고 놀 법한 현실적인 사치품이었던 겁니다.
2. 말하는 개구리와 대화하는 공주
공주가 놀다가 실수로 황금 공을 샘물(우물)에 빠뜨리고 맙니다. 안절부절못하는 공주 앞에 개구리가 나타나 말을 거는데 공주는 놀라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갑니다. 옛날 민담의 세계관에서는 동물이 말을 하는 것 정도는 기본 옵션으로 장착되어 있었나 봅니다. 판타지 세계관이라 생각하니 또 납득이 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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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에 앉아 있는 여자와 오른쪽 구석의 개구리 |
3. 거짓말쟁이 공주
개구리는 공을 찾아주는 대가로 공주와 같은 식기로 밥을 먹고, 공주의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자겠다는 황당한 요구를 합니다. 공주라면 싫다고 거절할 법도 한데, 당장 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냉큼 약속해 버립니다. 하지만 개구리가 샘물에서 공을 건져주자마자 공주는 성으로 도망을 가버립니다.
어떤 학자들은 개구리의 황당한 요구가 '성적인 은유'를 담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냥 개구리다 보니 반려동물 같은 느낌도 듭니다. 약속을 어기고 도망간 공주도, 이상한 요구를 한 개구리도, 이를 분석한 학자들의 해석도 다 이상하게만 느껴지는 민담의 매력이 있습니다.
4. 뽀뽀도 키스도 없다.
여기서 우리가 아는 동화와 원작 민담의 가장 큰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흔히 공주가 개구리에게 낭만적인 '뽀뽀(키스)'를 해서 마법이 풀린다고 알고 있지만, 원작 민담에는 그런 로맨틱한 장면이 전혀 없습니다.
성까지 쫓아와 침대에 올려달라는 개구리에게 참다못한 공주가 개구리를 벽에다가 온 힘을 다해 던져 버립니다. 이건 그냥 죽으라고 던진 폭력이었습니다. 황당하게도 벽에 부딪힌 개구리가 그 순간 마법이 풀려 아름다운 눈을 가진 왕자로 변신합니다.
더 이상한 건 왕자의 반응입니다. 자신을 벽에 내동댕이친 공주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마녀의 마술을 풀어주어 고맙다며 자기 나라고 같이 가자고 하는 겁니다.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공주의 외모가 해님조차 감탄할 만큼 어여쁘다고 나옵니다. 왕자는 벽에 던져진 것도 잊을 정도로 사실 그냥 지독한 '외모지상주의(얼빠)'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 해피엔딩인 걸까?
결말도 참 이해가 어렵습니다. 왕자와 공주가 마차를 타고 왕자의 나라로 가려는데, 왕자의 충직한 하인인 '하인리히'가 나타납니다. 그는 왕자가 개구리로 변했을 때 너무 슬퍼서 심장이 터져 버릴까 봐 강철 끈으로 가슴을 세 번이나 묶어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술이 풀리자 너무 기쁜 나머지 강철 끈이 '우지끈!'하고 차례로 끊어지며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하인의 충성심을 보여주려는 장치 같지만, 갑작스러운 가슴 끈이 끊어지는 엔딩은 좀 황당하지만 나름 해피엔딩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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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생긴 귀여운 고양이 |
다음 이야기는 제목이 '같이 살게 된 고양이와 쥐'입니다.
'개구리 왕자'에 이어 읽은 다음 이야기는 제목부터가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같이 살게 된 고양이와 쥐'입니다. 이 이야기는 시작하는 첫 문장이 너무나 맘에 듭니다.
"어떤 고양이가 어떤 쥐를 알게 되었다."
정말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인 도입부라고 생각합니다. 대상이 천적 관계인 고양이와 쥐라는 것만 빼면, 이 자리에 어떤 단어를 넣어도 마음에 들 것 같은 완벽한 문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쁜 동화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냉혹한 민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들의 동거가 어떻게 끝이 날지 이미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읽다가 너무 맘에 드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겨울을 날 준비로 굳기름을 한 단지 사다 놓았다고 나오는 부분입니다. 전 여기서 "귀여워"라고 외쳤습니다. 쥐와 고양이가 겨울을 날 준비로 서로 대화를 하고 돈을 모으는 과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정말 너무너무 귀여웠습니다.
여기서 문득 '굳기름'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단어 그대로 '굳은 기름'이 맞았습니다. 동물의 몸에서 나오는 지방이 굳어진 형태를 뜻하는 순우리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라드(Lard)와 '우지(Tallow)'입니다. 돼지비계나 소기름을 끓여서 액체로 식힌 뒤, 식히면 하얗게 굳는데 이것이 바로 굳기름입니다. 요리할 때 쓰는 버터와 같은 상태입니다. 저도 삼겹살을 구울 때 나온 기름을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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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충 모아 놓아서 지저분하지만 식용유보다 건강한 라드 |
삼겹살에서 나오는 기름이 식용유보다는 좋다고 생각해 버리기 아까웠습니다. 면포가 없어서 거르지 못해 살짝 찌꺼기가 보여 지저분해 보이지만, 이게 바로 고양이와 쥐가 한 단지 사 놓은 굳기름과 비슷한 걸까 생각하니 뭔가 재미가 있습니다. 고양이가 혼자 몰래 먹을 만큼 그들에게는 맛있는 걸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옛날 사람들의 소중한 '저장용 식재료'였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과거에는 음식을 오래 보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기름을 항아리에 담아 서늘한 곳에 굳혀 보관하며 겨울철 요리에 사용했습니다.
즉, 이야기 속 쥐와 고양이가 겨울 양식으로 교회의 제단 및 서늘한 구석에 숨겨둔 기름 항아리인 것입니다.
도입부가 진짜 진짜 마음에 들었고, 굳기름을 준비하는 과정까지는 참 귀여웠는데 날것의 민담답게 끝은 참혹한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ㅎ
마치며
어렸을 때 책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법 읽었었는데, 《바다소년 표류기》같은 제목들이 대충 생각납니다.
제가 그림형제 이야기들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미리 알고 있어서 예전에 읽었던 것인지, 아니면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살아오면서 귀에 들어온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정리해서 올리는 과정이 워낙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바로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꼭 기록하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남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