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린 레드(MANDARIN RED) | 이 색이 되기까지 (520 색연필 #17)

몇 년 전에 큰맘 먹고 구매한 520색 색연필이 있습니다. 520개나 되다 보니 색상 이름이 굉장히 다양합니다. 저는 그림을 못 그리기에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연필 이름을 순서대로 기록하는 포스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기록하는 17번째 색연필은 '만다린 레드(Mandarin Red)'입니다.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브루트프너(Brutfuner) 520 만다린 레드(Mandarin Red) 컬러 색연필 사진. / A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in "Mandarin Red" placed horizontally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만다린 레드(Mandarin Red)' 색연필 한 자루



이 이름을 처음 보았을 때는 주술이나 부적 같은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제게는 1편이 최고였지만 그래도 재밌게 봤던 영화 '아이언맨 3'에서 빌런 이름이 '만다린'이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얼마 전 과일 종류를 검색하면서도 '만다린'을 본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제게는 빌런과 과일 종류로 남아있던 이름입니다. 실제 '만다린 레드'라는 색상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찾아본 것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만다린의 기원

16세기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영토가 줄었지만 포르투갈은 지금도 존재하는 국가입니다) 상인들과 선교사들이 명나라 시대의 중국에 처음 도착해 조정의 고관대작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인들은 '명령하다'라는 뜻의 자국어 Mandar동남아 지역에서 관리를 뜻하던 단어인 Menteri가 발음과 뜻이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이 두 단어를 결합해 '만다림(Mandarim)'이라는 말을 만들어 중국의 지배계층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황제의 명령(Mandar)을 받아 집행하는 동양의 관리(Menteri)"라는 뜻을 직관적으로 담아낸 이름이었습니다.

이 '만다림'이 영어권으로 넘어가면서 오늘날의 '만다린(Mandarin)'이 되었습니다. 이때 서양인들에게는 중국의 고위 관리, 그들이 쓰던 공용어(관화), 그리고 그들의 옷 색깔을 닮은 귤까지 모두 '만다린'으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 'MANDARIN RED' 글자와 숫자 '339'이 각인된 브루트프너(Brutfuner) 520 색연필 표면을 확대한 사진. / A close-up photo of the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surface inscribed with "MANDARIN RED" and the number "339", placed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339, 'MANDARIN RED'


관복의 색을 닮은 만다린 오렌지

18세기 무렵, 서양에 중국이 원산지인 작고 달콤한 감귤류가 서양에 소개되었습니다. 어원사전(Online Etymology Dictionary)의 기록에 따르면, 서양인들의 눈에 이 과일의 색상이 중국의 고위 관리(만다린)들이 입던 화려한 주황빛 관복 색깔과 똑 닮아 보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래해 사람들은 과일 자체를 자연스럽게 '만다린 오렌지'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771년경부터 영어권 문서에 본격적인 기록으로 등장합니다.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 은박으로 'R46 / 520 colors'가 새겨진 브루트프너(Brutfuner) 520 색연필 끝부분을 확대한 사진. / A close-up photo of the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end with "R46 / 520 colors" inscribed in silver foil, placed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반짝이는 은박 R46 / 520 colors


돈 없이 일한 학자들의 사명감(1883년)

과일 이름이던 단어가 공식적인 '색상 이름'으로 정착한 것은 1883년입니다. 오늘날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의 옛날 모습인 언어 기록 체계에서 이 색상명을 문헌에 최초로 공식 등재하고 분류했습니다. 고유한 색상 명칭인 'Mandarin Orange'의 사전적 정의가 확립된 시점입니다.

1883년 당시에는 지금처럼 색상을 표준화해서 돈을 버는 기업이 없었습니다. 당시의 표준화 작업은 언어학자, 식물학자, 사전 편찬가들이 모여 세상의 모든 단어를 정리하고자 뛰어든 순수한 학술 사업이었습니다.

그 거대한 단어의 바다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만다린 오렌지'라는 색이름도 하나의 단어로서 당당히 기록에 남게 된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사명감과 지적 탐구를 위해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 스틸컷. 수많은 책과 조명으로 가득 찬 서재(스크립토리움)에서 제임스 머리(멜 깁슨)가 책상에 앉아 돋보기를 들고 서류를 살피고 있으며, 뒤편에서 윌리엄 마이너(멜 깁슨 뒤쪽 공간의 남성)가 책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 A still cut from the movie The Professor and the Madman. In a scriptorium filled with countless books and warm lamps, James Murray (Mel Gibson) is sitting at his desk inspecting documents with a magnifying glass, while another man stands in the background browsing books.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 스틸컷



학자들은 신문에 광고를 내어 시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대중들도 역시 자신이 일상에서 접한 단어와 문장들을 적극적으로 제보했습니다. 특히 옥스퍼드 사전 편집장이었던 제임스 머리(James Murray) 같은 인물은 국가 지원이 끊기자 자기 집 마당에 철제 창고(스크립토리움)를 짓고, 자비를 들여가며 평생을 바쳐 이 색상명들을 정리했습니다. 정말 멋지고 대단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집념과 열정입니다.

마침내 색이 된 만다린 레드 (1923년)

앞서 이야기한 사전의 개정 작업과 서구 사회의 색채 표준화 작업이 계속 이어지던 중, 1923년에 이르러 오늘 기록하는 이 색상의 진짜 역사가 시작됩니다.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의 섬유, 패션, 인쇄 업계는 제품을 만들 때 서로 색상을 정확하게 소통하기 위해 대대적인 '색상 이름 표준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는 특정 개인 한 명의 독단이 아닌, 수많은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로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색채 학자들과 디자이너들은 기존의 만다린 오렌지보다 태양을 듬뿍 받아 훨씬 더 붉고 선명한, 다홍빛 과육과 껍질 색에 주목했습니다. 그렇게 1923년, '만다린 레드(Mandarin Red)'라는 단어가 정식 색상 이름으로 문서화되었고 표준 색상표에도 최초로 등록되었습니다.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거친 질감의 배경 위, 옅은 갈색의 나무 단면과 뾰족한 연필심이 선명하게 보이는 브루트프너(Brutfuner) 520 색연필 만다린 레드(Mandarin Red)의 촉 부분을 확대한 사진. / A close-up photo of the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tip in "Mandarin Red" on a textured pink and white background, clearly showing the light brown wood grain and the sharpened pencil lead.
만다린 레드(Mandarin Red)의 연필심


만다린 레드 종이에 색칠한 이미지

만다린 레드 색연필로 종이에 직접 색칠해 봤습니다. A4종이에는 빨간색으로 그 아래에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자른 종이에는 좀 더 주황색으로 제 눈에는 보이는 것 같습니다. 색연필이 단단하고 무르지 않지만 매우 잘 색칠되는 것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서로 다른 질감과 색상을 가진 4가지 종류의 종이 위에 브루트프너(Brutfuner) 520 만다린 레드(Mandarin Red) 컬러 색연필로 선과 별 모양 등을 그리며 발색 테스트를 한 사진. / A photo of a color swatch test using the Brutfuner 520 colored pencil in "Mandarin Red" on four different types of paper, showing various lines and star shapes.
종이 종류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만다린 레드(Mandarin Red)의 매력


마치며

그 옛날, 색이름 하나를 정하는 데 대체 어떤 깊은 뜻과 노력이 있었던 건지 찾아볼수록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오늘날처럼 돈을 벌기 위해 한 일도 아닌데, 수많은 학자와 대중이 자발적으로 힘을 모아 색상의 이름을 정하고 표준으로 등록했다는 사실이 참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이 색은 결코 그냥 대충 "너는 오늘부터 만다린 레드 해라!" 하고 쉽게 지어진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시대를 뛰어넘은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정교한 작업이 만들어낸 거대한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색연필 중에 그저 하나일 뿐인데, 결코 가볍게 지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습니다. 수백 년의 세월과 이름 없는 노력이 쌓여 제 손안의 색연필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묵직한 감동으로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세월과 노력해 준 사람들의 결과물이란 것이 생각할수록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